[경향신문]기업들 ‘창의적 인재’ 선발기준 모호…구직자들 불만

2008년 04월 27일

“인재상 확립 • 기업문화 개선부터” 지적도

이른바 명문대 출신으로 지난해 말 굴지의 ㅇ사 공채에서 최종 면접까지 마친 ㄱ씨는 무난한 합격을 기대했으나 ‘예상밖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는 그룹 계열사 내 지인을 통해 떨어진 이유를 알아봤다. 그는 “성적은 최고 수준이어서 아까운데 너무 평범하고 창의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라 결국 떨어뜨렸다”는 답변을 듣고 더 큰 충격에 빠져야 했다.

대기업들은 최근 앞다퉈 ‘창의성’을 채용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만약 구직희망자가 입사 면접시험장에 와서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가는 ‘마당쇠형’ 인물로 분류돼 채용의 기회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취업전문 사이트 사람인은 27일 올해 상반기 주요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 요강을 분석해 기업의 70%(복수응답)가 ‘창의성’을 으뜸 인재상으로 꼽았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도 27일 최고경영자(CEO)를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이들 가운데 89.2%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자신과 조직의 창의성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기업들이 직원 채용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창의성’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의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모호하고 주먹구구식이어서 구직자에게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창의적 인재 선별에도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창의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관념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 같은 한계성을 빌미삼아 기업들이 독특한 질문이나 자체 인성•적성검사로 ‘창의성 유무’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 관계자들은 “도전정신 등을 종합 평가하기 때문에 창의성 개념을 콕 집어 설명하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또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창의적 사고와 행동을 실무에 적용하는 인재를 찾는다”면서도 “창의적 인재 채용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채용제도 혹은 시험제도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취업준비생들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취업준비 중인 서강대 박모씨(28)는 “요즘 면접 스터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하는 것이 외워서 잘 말하기와 새로운 시각으로 대답하기”라면서도 “기업이 원하는 창의적 인재 기준이 애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단순 질문은 대폭 줄고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묻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제품의 특징과 장점에 대해 설명해보라’는 진부한 질문 대신 ‘우리 회사 제품은 1만원짜리인데 경쟁사 것은 8000원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 회사 제품을 팔 것인가(동아제약)’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도 창의적 인재를 가려내는 데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창의적 혁신 컨설팅사인 크리베이트 이다혜 컨설턴트는 “기업들이 엉뚱하거나 특이한 사람을 창의적 인재로 뽑았다가 효과를 못 봤다”며 “단순히 독특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생각이 깊고 서로 긍정적 피드백이 가능한 인물이 조직에서 더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창의적 인재 모으기에 앞서 기업문화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중견업체 한 임원은 “예전에 창의성을 강조하는 대기업에서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나와 보니 창의적 사고를 억누르는 조직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며 “요즘은 후배들의 창의성을 살리는 데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08.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