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이디어 회의 시간. 박부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이디어를 재촉하고, 눈치만 살피는 사원들. 이대리가 마지못해 아이디어를 내지만 돌아오는 박부장의 대답은 “그거 이미 경쟁사에서 하고 있잖아.” 시선은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으로 쏠리고 떠듬떠듬 아이디어를 내보지만 박부장은 단칼에 “그거 3년 전에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닌가? 요즘 신입들은 왜 이 모양인지…”로 마무리 하면서, 역시 침묵이 금이구나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직원들. 오랜 침묵과 눈치 보기에 지쳐있던 직원들에게 드디어 끝을 알리는 한마디. “다음 회의 시간까지 각자 아이디어 10개씩!” 회의는 끝났지만,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창의와 혁신이 우리 시대의 구호처럼 자리 잡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아이디어 회의의 풍경은 아직도 긴 침묵과 어색한 눈치보기로 점철됩니다. 회사 들어오기 전에는 분명히 아이디어도 많고, 아이디어 내기도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직장에서 연차가 높아지면서 어느새 아이디어 내는 게 힘들고 무섭고 두려워졌습니다.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이 원래 어려웠는데 젊은 패기에 그걸 몰랐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요? 올해부터는 반짝 반짝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 솟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인재가 될 수 있을까요?
◆ 혁신은 고통스럽다?
먼저 혁신이라는 단어를 살펴볼까요. 흔히들 ‘혁신’을 직역해서 가죽을 벗겨서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가죽을 벗겨낸다 하니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끔찍합니다. 이런 까닭에 혁신이란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혁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혁’이라는 한자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죽을 뜻하는 한자는 ‘혁’ 외에도 ‘피(皮)’도 있습니다. 혁과 피의 차이는 피는 짐승가죽을 벗겨낸 것이고, 혁은 짐승 가죽에서 털을 다듬고 없앤 것입니다. 즉, 가죽을 뜻하는 ‘피’를 쓰지 않고, ‘혁’을 썼다 함은 이미 가공한 가죽을 더 새롭게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어로 놓고 보면 혁신(innovation)은 안에서 밖을 뜻하는 in과 새롭다는 뜻의 nova가 결합된 것으로 이를 해석하면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롭다는 의미입니다. 즉 새롭다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부터 시작해서 보이는 겉까지 달라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새롭다는 것만으로 혁신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엽기적이고 기괴한 것들은 분명히 새롭다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혁신의 이름표를 붙여주지는 않습니다. 혁신은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즉,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것이 바로 혁신입니다.
◆ 혁신은 가치 있는 새로운 것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는 것, 즉 유용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이 혁신인데, 흔히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면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고 여깁니다. 오죽했으면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이라고 여길까요?
그런데, 사실 새로운 것을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던 것을 조금만 비틀거나 뒤집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울 수 있습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게 어려운 이유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즉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창출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것부터 먼저, 가치는 나중에 따져라
아마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 번쯤 해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아이디어 회의 시간에 머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내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혹은 ‘이게 괜찮은 생각인가?’라는 마음 속에 반문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말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었던 경험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을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새로운 것조차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 새로운 것부터 내고, 그 이후에 가치를 따져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고 이렇게 단계를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 많은 아이디어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혼자서 사고할 때는 물론 여럿이서 함께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아이디어 회의 때 더욱 효과를 발휘합니다.
◆ 아이디어는 유레카?
중요한 발견을 할 때 우리는 ‘유레카’를 외칩니다. ‘유레카’는 섬광처럼 번뜩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는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디어는 잠복기를 거쳐 나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독일의 화학자 케큘레는 벤젠 구조에 대해 오랜 시간 골똘히 생각하다가 어느 날 꿈 속에서 꼬리를 문 뱀을 보고 벤젠 구조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마치 닭이 알을 품듯 아이디어의 부화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이러한 과정은 생략한 채, 아이디어는 마치 섬광의 불꽃처럼 묘사하고 남들은 다들 그런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 아이디어는 묵혀야 제 맛!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급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다그치기 보다는 오히려 묵혀두어야 합니다. 의식의 영역에 있던 아이디어를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내야 합니다. 청국장도 발효를 하면 원재료인 콩에는 없는 비타민들이 만들어지면서 영양학적으로도 더 우수한 음식이 되듯이, 아이디어도 묵히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빛날 수 있습니다.
사실 의식의 영역에서 방해 받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자라나기가 쉽지 않지만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생각은 아이디어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무 오랫동안 무의식의 영역에만 있지 않도록 한 번씩 꺼내보고 다시 묵히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담금질을 하듯 아이디어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창의는 타고나는 것이다?
흔히들 창의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의성을 좌우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고, 태어날 때 갖고 있지 않으면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창의는 타고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창의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각양각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제각각 다 다른 사고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정답이다’, ‘이래야 한다’ 는 기준 없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고 그리는 어린 아이들은 모두가 예술가입니다. 오죽하면 피카소가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했겠습니까.
문제는 타고난 창의 근육을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않다가 시대가 창의, 혁신을 외치자 퇴화 일보 직전의 창의 근육을 무리하게 쓰려다 보니 마치 자신에게는 창의 근육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고, 그 근육을 잘 단련한 다른 사람들은 원래부터 타고난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타고난 창의 근육을 퇴화시키지 않고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어, 영어, 수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을 키웠듯이 창의, 혁신 근육도 부지런히 단련해야 합니다. 단련한다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에서 아주 작은 실천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을 떠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자극에 노출되고, 자연스럽게 많은 아이디어에 둘러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일년에 한 두 번 가기도 힘든 여행으로 창의근육을 단련시켜야 한다면 많은 직장인들에게 기쁜 소식이기 보다는 오히려 절망적인 소식에 가까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창의를 훈련할 수 있을까요?
◆ 일상에서 하는 훈련
가장 간단한 것은 습관처럼 하던 것에 작은 변화 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어떻게 출근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습관대로 일어나서 옷을 입고 출근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을 일일이 다 생각해야 한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 될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한다는 것은 시간도 절약되고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할 수는 있습니다. 다르게 하고 싶다면 의식적으로 습관을 뒤집을 필요가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면, 퇴근 길에는 지하철을 타 본다든지 버스를 타고 옆 창문만 바라봤던 사람이라면 뒷 창문을 바라보는 식입니다.
실제로 크리베이트에서는 아이디어 카드를 통해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하나씩 아이디어 카드 한 장을 뽑고, 그 카드에 적힌 내용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길을 잃어버려라!’는 카드를 뽑았다면 그 날 하루는 길을 잃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 덕택에 평소에 절대로 가보지 않았을 골목길에서 우연히 새로운 곳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낯선 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 깨어있기
이런 일상 훈련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언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지?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지? 혼자 있을 때 더 잘 떠오르는지, 함께 있을 때 더 잘 떠오르는지? 무언가를 먹고 나면 더 잘 떠오르는지, 자고 나면 더 잘 떠오르는지?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얼마나 깨어있고, 얼마나 의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창의와 혁신이 시대의 구호가 되어 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결국 창의적이고 혁신적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어있고, 의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뻔한 교과서 같은 이 공식이 창의와 혁신의 가장 기본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Insight of GS Caltex 2013.03.27